본래 우리네 삶이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 중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흘러가는 것인가 보다.
그리고 대화란 본디 서로 생각이 다르고 원하는 결론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고 들어보고 이해해보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우린 때때로 맹목적으로 결과만을 원할 때가 있다.
결과는... 어디까지나 결과일 뿐, 결과를 위한 수단의 정당화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과정 자체가 유의미할 때도 있는 것이고 때론, 결과보다 과정 자체에 그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삶의 목적이 어떤 성공이나 행복, 혹은 결과적인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 살아가는 것. 살 수 있는 만큼 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듯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나 니체의 허무주의 등을 떠올려보면,
본디 정형화된 무엇가를 확정짓는 것 자체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곧 미쳐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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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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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눈이 온다. 2015년 보는 첫눈이다.
그리고 나는 묵직한 고민을 한다. 나의 연구는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 건가.
어느정도 수준을 목표로 진행해야 하는 것인가.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는 무엇인가.
맹목적인 성과를 쫓는 길을 택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지난 ICMR에서 무엇을 배웠고, 올해 내가 진정 갖추고자 했던 덕목은 무엇이었는가.
조금 더 솔직하게 조금 더 차분하게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나의 내일을 조명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어딜 향하고 있는지, 내가 살고자 하는 하루는 어떤 하루인지...
나는 다시금 나 자신을 추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낀다.
더불어, 실로 나는 풀 한 포기 마냥 흔들리며 청춘이란 비바람을 마주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르고, 여전히 많은 것이 어렵다. 여전히 흔들린다. 그러나 흔들림이 이젠 자연스럽다.
왜 흔들리는지, 흔들린다는 것이 나의 어떤 모습인지를 이해한다.
그래서 흔들림을 두려움 없이 작은 긴장감을 안고서 타고 있는 거 같다.
워터 스키 - 피천득
워터 스키는 설령을 타는 스노우 스키보다 나은 점이 있다. 스노우 스키는 산 밑으로 내려가면 서게 된다. 워터 스키는 보트가 끄는 로프에 달려가기는 하지마는 그런 제한은 받지 않는다. 앞에서 달리는 모터 보우트는 전차를 끌고 달리는 그리스의 준마와도 같다.
내가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장고를 메고 '놀량'을 한번 불러보겠다. 왈츠를 밤새워 추어보겠다. 그러나 어떤 호강보다도 우선 여름 바다에서 워터 스키를 타보겠다.
젊었을 땐 여름이면 산으로 갔었다. 그때 나의 다만 하나의 사치는 금강산에 가는 것이었다. 외금강이 생리에 벅차서 늘 내금강 품안을 찾아갔다.
그리고 편한 대로 장안사 근방에 숙소를 정하였다. 매일 전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다가 지루하면 표훈사를 지나 만폭동까지 올라갔다.
목이 마르면 엎드려 시내에 입을 대고 차디찬 물을 젖 빨듯이 빨아 마셨다. 구름들이 놀다가 가는 진주담 맑은 물을 들여다보며 마냥 앉아 있기도 했다.
근년에는 여름이면 바다로 가고 싶다. 내 자신 파도를 타기에는 이미 늦었으나, 바다에는 파도를 타는 젊은이가 있을 것 같다. 모터 보트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로프 잡은 팔을 내뻗고 무릎을 약간 굽힌 채 가슴과 허리를 펴고 앞이 들린 스키로 파도를 달리는 스키어가 보고 싶다. 물보라, 물보라가 보고 싶다. 워터 스키를 못 보더라도 바다에 가고 싶다.
양복바지를 걷어올리고 젖은 조가비를 밟는 맛은, 정녕 갓나온 푸성귀를 씹는 감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