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빼빼로데이...
어제 트레이너의 따뜻한 위로와 공감에 힘입어, 살짝 기운을 내어... 연구실 식구들에게 빼빼로를 돌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빼빼로 포장지 뒷면에 몇 마디 손글씨로 편지를 적어서 각자의 책상에 놓았다.
그러고 나서 피천득 수필집 필사를 하는데, 희한하게 글씨체가 최근에 쓴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여전히 뒤로 갈수록 글씨가 삐뚤어지고, 마음이 급해져서 오타가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서호건스러운데...
트레이너의 말처럼... 그럴 때 일수록 마음을 다잡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진겸아, 너라도 곁에 있었으면...
이런 날 돈가스 먹으러 나가자고...
낮밥 먹으며 수다 떨며... 낮술 한 잔 하고서 웃으며 들어왔을텐데...
앞길 창창한 내가 이러한데,
까마득한 안개 속을 헤치며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는 오죽 외로우셨을까...
우리 어머니는 오죽 힘겨우셨을까...
감사하고... 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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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피천득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天癡)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이러한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렇게 읊은 시인도 있다. 이들은 사치스런 사람들이다. 나같이 범속(凡俗)한 사람은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두꺼운 옷을 벗어 버리는 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띠우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그림이나 조각을 들여다볼 때, 잃어버린 젊음을 안개 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을 업(業)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 글을 통하여 먼 발자취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젊음을 다시 가져 보게 하는 것은 봄이다.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나 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헤어진 애인이 여자라면 뚱뚱해졌거나, 말라 바스러졌거나 둘 중이요, 남자라면 낡은 털자켓같이 축 늘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시뻘개지고, 눈빛이 혼탁해졌을 것이다.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지나간 날의 애인에게서는 환멸(幻滅)을 느껴도, 누구나 잃어버린 젊음에게서는 안타까운 미련을 갖는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煩惱)를 해탈(解脫)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知性)과 둔해진 감수성(感受性)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智慧)도 젊음만은 못하다.
인생은 40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40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93퍼센트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40년이라면 인생은 짧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면 그리 짧은 편도 아니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하고, 부르는 아이들의 나비는 작년에 왔던 나비는 아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지만 그 제비는 몇 놈이나 다시 올 수 있을까?
키츠가 들은 나이팅게일은 4천 년 전 루스가 이역(異域) 강냉이 밭 속에서 눈물 흘리며 듣던 새는 아니다. 그가 젊었기 때문에 불사조(不死鳥)라는 화려한 말을 써 본 것이다. 나비나 나이팅게일의 생명보다는 인생은 몇 갑절이 길다.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살구꽃, 그리고 라일락·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40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은 아니다. 더구나 봄이 40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것이다.
녹슬은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에 유폐(幽閉)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 오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