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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마치 내 마음 위에 쌓인 먼지들을 씻어내리려는 듯...


어제 조용히 가만히 숨 죽여 쉬었다. 


덕분에... 한결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굳어버린 내 모습을 다들 주변에서 어색해 하고 다소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기도 하고, 때때로 몇몇 이들에겐 불필요한 실망과 상처를 주고 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한 나의 부덕함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남긴다.


그러나 나는 완벽한 사람도 착한 사람도 훌륭한 사람도 존경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냥 서호건이라는 한 인간이다. 때론 열정적이고 때론 게으르고 때론 멋있고 때론 한심한...

그냥 그런 인간이다. 그냥... 가을 날 뚜벅뚜벅 가로수 길을 걷다 눈 앞에서 떨어지는 낙엽 하나 마냥...


한때 조그맣게 눈을 틔우고 푸르게 커졌다 노랗게 붉게 화려한 색으로 세상을 감동시켰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툭하고 떨어져 감탄을 내뱉던 사람들의 발걸음에 밟히고 으스러져 다시 흙과 먼지가 되는... 그냥 낙엽 같은 게 나다.


나에게 웃음만을 기대하고 밝은 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들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요.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을 원하는 것이다.


난 삐에로 처럼 살 의향이 없다.

난 울분을 감추며 웃음짓고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불행한 것이 아니다. 나는 때때로 슬퍼하고 우울해할 뿐이다. 가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외로워서 그럴지도 모르고...

호르몬 분비가 엉켜서 생겨난 정신적인 혼란일 수도 있으리라... 그건 게의치 않는다.

중요한 건 난 이러한 나의 모습과 감정과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나의 태도들을 객관화할 수 있는 상태라는 점에 감사하고,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기보다 나의 여러 면 중에 하나임을 분명하게 알고 보듬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기분을 내기 위해서 더 많을 것을 시도하고 더 많은 이들을 만나려 했던 과거의 도전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건 검은 봉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봉다리를 이런 저런 저울에 대어보고 불을 비춰보고 열을 가해보고 냉장고에 넣어보는 것과 같이...

다소 엉뚱한 접근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검은 봉투를 천천히 열어보면 된다. 잘 안 열리면, 조심히 뜯어보면 된다. 그래야 안다. 진짜 무엇이 들었는지를...


그 과정에 내용물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행여 다치지 않게, 깨지지 않게 조심스러움을 가지고 임해야할 뿐이다.

그래서 시간과 기다림과 인내와 이해가 필요하다.


어제 문득 사랑 받는 것과 이해 받는 것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난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걸 너무나도 잘 할 줄 아는 거 같다. 그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내가 왜 이런지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고 더 많은 스스로에 대한 관찰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러면서, 하나 더 조금 더 나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다.

우울한 건 그냥 기분이 그런 거다. 내 손가락이 추우면 빨개지는 것처럼...

우울한 마음이 채워져 얼굴에 미소가 옅여졌을 뿐이다.



IMG_20151113_134740.497.jpg

빠리에 부친 편지 - 피천득


지난 토요일 오후, 오래간만에 비원에 갔었습니다.


비를 거어주던 느티나무 아래, 그 돌 위에 앉았었습니다.

 

카페 테라스에서 오래오래 차를 마시며 그랑 불바르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고 있기도 할 그대와 같이, 그러다가 나는 신록이 밝은 오월의 정원을 다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섰다가는 다시 걸었습니다.

 

꽁꼬르드에서 에뜨왈르를 향하여 샹제리제를 걷기도 할 그대와 같이, 그대가 말한 그 아름다운 종소리들이 울려옵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영원한 애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대와 같은 외로운 나그네를 위하여 서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밤 열한 시. 그곳은 오후 세 시쯤 될 것입니다.

 

이 순간에 그대는 화실 캔버스 앞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 아니면 뛰율르리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루브르 박물관에 계실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프린트로 보여 드린 세잔느의 정물화 '파란 화병' 앞에 서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란 화병에 파란 참푸꽃, 그것들이 파란색 배경에 배치되어 있지마는, 마치 보색에 놓여 있는 것같이 또렷하게 도드라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그는 세련된 '칼라리스트'입니다.


헤어지면 멀어진다는 그런 말은 거짓말입니다. 녹음이 짙어가듯 그리운 그대여, 주고 가신 화병에는 장미 두 송이가 무서운 빛깔로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엄격한 거부로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입니다.


한 주일이 그리 멀더니 일 년이 다가옵니다. 가실 때 그렇게 우거졌던 녹음 위에 단풍이 지고 지난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더니, 이제 라일락이 자리를 물러서며 신록이 짙어갑니다. 젊음 같은 신록이 나날이 원숙해집니다.

 

둘이서 걸으면 걸을 만하다시던 서울 거리를 혼자서 걷기도 합니다. 빠리는 철이 늦다지요. 그래도 지금은 마로니에가 한창이겠습니다.

 

걸음걸음 파아란 보라빛 그대의 치맛자락, 똑같은 구두를 신은 여인이나 같은 모자는 만날 수 없다는 빠리, 거기서도 당신의 의상은 한 이채일 것입니다. 빠리의 하늘은 변하기 쉽다지요, 여자의 마음 같다고. 그러나 구름이 비치는 것은 물의 표면이지 호수의 깊은 곳은 아닐 것입니다. 날이 흐리면 머리에 빗질 아니하실 것이 걱정되오나, 신록 같은 그 모습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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