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겹게 감동적인 도전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방송은 방송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무한도전 조정1~7편을 쭉지켜봐았다.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좋은 결과를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전반적으로 준비과정에 진정성이 결여된 느낌을 받았었다. 이러한 감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용이다. 진정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알 길이 없다. 진정성은 본인들의 마음에 담겨있는 것일 뿐, 제 3자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들의 표면적인 모습에서 내가 느끼는 스스로의 진정성에 비추어 얼마나 그들이 진지한지를 가늠해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준과 잣대를 들이밀고 그 잣대로 세상의 진정성을 재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부분에 대해선 좀 더 생각을 해봐야할 부분이라 하겠다.
방송매체 특성상 왜곡과 허구, 과대포장이 불가피하다. 리얼버라이어티라고 할지라도 그저 드라마보다 더 리얼한 드라마일 뿐, 결코 순도 100% 리얼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연출이 가미된다면, 리얼이랍시고 곧이 곧대로 믿는 시청자들만 기만당하게 될 따름이다. 물론 우리가 그 순도를 알길은 없다.
한편 최근에 상영된 트루맛쇼(김재환 감독)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맛집 방송프로그램이 얼마나 상업적이며 비도덕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트루맛쇼 자체도 연출된 부분이 있었을 수 있으므로 어디까지가 왜곡된 것인지는 알길이 없다. 마이클 무어의 작품들 "자본주의: 러브스토리", "식코" 등의 작품들도 사실이랍시고 공개하는 것들을 어디까지 우리가 믿어야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들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해야한다. 결국 방송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본인이 직접 체험하고 겪어보지 않는 이상 단순한 언어적 전달만으론 진정성을 공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우리의 판단력이다. 판단력을 발휘하지 않으려는 독자와 시청자들은 본인의 판단을 대다수의 판단에 의지하거나 방송이나 언론 매체의 공공의 발언에 의지하게 된다. 이를 두고 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본인의 판단력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언론매체의 공신력있는 잣대에 맞춰사는 것보다 더 잘 산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 산다의 "잘"이 어떤 가치이냐에 따라서도 문제의 본질이 매우 달라질 수 있으므로 여기선 보편적인 상식선에서 고려하자.
따라서 우리는 방송을 보면서 분명히 인지해야한다. 방송은 방송일 뿐이라는 것을... 아무리 리얼 버라이어티라고 할 지라도 방송은 방송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 그들은 하는 말과 행동이 모두 솔직한 것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대신 우리는 방송을 통해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느낄 수는 있다. 아무리 사실과 같은 blah-blah-blah 들이라도, 결국은 판타지일 뿐이다.
문학과 예술은 우리에게 하나의 감정 혹은 하나의 정답을 주려고 애써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개개인의 삶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분해된다. 각자가 공감하는 부분과 반감을 느끼는 부분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내가 눈물 흘리는 타이밍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왜 내가 여기서 눈물이 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수 있다. 감동이란 그런 것이다. 시청자를 감동시킨다는 것은 결국 보편적인 감정의 패턴에 포커스를 두고 그걸 자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공감할 포인트를 예상하고 준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시청자가 감동했다면 그건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굉장히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감동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저렇게 억지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하는 사랑과 감동, 열정 등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감정들이다.
반면 억지로 유도하는 부정적인 감정들로 질투, 고통, 슬픔 등과 같은 감정들은 대게 수동적이며 강제적인 감정들이다.
내가 감동을 느꼈던 내용은, 그들의 진정성 여부를 떠나서 설령 그 모든 것이 100% 연출이었을지라도...
내가 느낀 감동에는 달라짐이 없다. 내가 느낀 것은 도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도전이라는 점이었다.
조정 경기에서 꼴지를 하든 1위를 하든, 대중은 그들의 도전을 금새 잊는다.
그들이 그저 시청자들의 유희를 위한 광대들일 뿐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개인적으로는 그들에게 이러한 도전의 경험은 평생 잊지못할 추억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결과 어떻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특별한 추억이고 그들만의 유기적인 신뢰를 갖게하는 강한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성이 있었다면 말이다.
내가 보고 느낀 바는 그렇다.
멋은 남이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보며 느끼는 것이 멋이다.
마지막 Finish 라인을 향해가면서 "멋지게 들어가자!"는 정형돈의 외침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멋지게... 시청자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었을까? 그러기엔 늦었다. 연습도 부족했고, 출발도 안 좋았다.
유재석의 바람은 기적이 일어나서 7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허나 이는 출전한 다른 팀들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기적은 경쟁에서 일어나서는 안된다. 생명을 살리는데 기적일어난다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일 수 있겠으나, 내가 기적처럼 다른 이들은 앞지르는 것은 결코 생각지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아야 할 일이다. 그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노고에 합당한 결과를 얻어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살이가 결코 그렇게 곧이곧대로 하는만큼 다 되돌아오는 법은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피해의식에 젖어있으며 세상을 불공정한 사회로 만드는 씨앗이 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내가 노력한 만큼 기대한대로 일이 안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노력에 의해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나만의 노력은 내가 기대하는 결과를 이루는 하나의 큰 요소일 뿐, 그것만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난 나날 살아오며 사회에 순응했던 과거와 어울렸던 주변 지인들 가족들 나아가 일류에 미친 모든 영향이 작용한 최종적인 결과일 뿐이다. 내가 그 결과에 부응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그 결과가 나타날 확률이 좀 더 높아짐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멋지게 사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느끼는 본인의 모습의 멋을 가꿔가야함을 이번 방송을 통해 새삼 느꼈다.
그러나 이 모든 관념 역시 지나치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지나친 몰입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편으론 나만의 '멋'을 찾겠다는 마음에 연민을 품어야 할 것만 같다.
어려운 문제다. 우리의 삶을 어느 장단에 맞춰야 좋을지...
'나'라는 존재인지 내가 속한 '세상' 혹은 '사회'인지...
물론 이상적인 것은 '나'라는 존재에 몰입할 뿐이지만, '세상'의 장단이 나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그 반대는? 그 반대도 있을 수 있겠다. '세상'의 장단을 쫓다보니 어느새 그 장단이 '나'만의 장단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역시 삶에 애시당초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답을 찾으려는 마음 자체가 가장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결국 회의론자에 가까워지는 것인데, 새로움은 회의가 아닌 불평과 불만족과 도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