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나는 것은 - 서호건 (feat. 서은정)
기차를 타고 고향엘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매듭 짓지 못한 채 품고온 일상의 그림자들을
한꺼풀 한꺼풀 차근차근 벗어놓고 나니
비로소 창 밖으로 수 천개의 새하얀 눈꽃들이
멈췄던 춤사위를 다시 흩날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홀라당 빨개벗은 채 몇 분이나 흘렀을까요
마음 한 구석으로 스며드는 우풍에 한기가 느껴져
덮을 만한 걸 찾아보다 좌석받이에 빼꼼히 매달려
저를 바라보고 있던 여행잡질 꺼내어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다양한 무늬가 눈에 띄더군요
자동차, 구두, 시계, 사람, 음식, 여행지...
그렇게 한동안 두리번거리다 박물관을 발견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참 별의 별 게 가득한 곳이지만
그러면 그렇지 참 볼만 한 게 하나도 없더군요
...
그러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습니다
스치듯 당신을 마주친 프라하에서의 따스한 오후
우린 처음 만났는대도 마치 평생를 알고 지낸 사이처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았죠
점심을 먹고 선 우리도 박물관을 갔었지요
당신이 너무나도 좋아한다는 분의 유품들이 가득 있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젠 하나도 기억나지가 않네요
박물관 제목, 당신이 좋아한다는 그 분의 이름,
함께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 심지어 당신의 미소까지도
참으로 야속하게도 그 무엇도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네요
그저 당신과 그날
같은 공길 마시며
같은 복도를 걷고
같은 사진을 보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편지를 읽고
같은 순간을 쓰며
함께 했었다는 것
오직
그 뿐이네요
기억 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