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관련 글짓기] 청소년을 믿어라! 그리고 진실로 보여라!
'싸우면서 우정이 싹튼다.' 이런 모순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폭력이라는 것을 삶의 일부로 여겨온 탓이 아닐까? 일제통치하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시작되어 독재정치 땐 계엄령을 통해 군인이 시민을 무참히 폭행한 사건까지. 그러한 암담한 폭력의 역사 속에 피어오른 민주주의의 내면에는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학교 폭력'은 오히려 미미한 수준의 폭력사례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싸움'을 통해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온 과거의 흐름에 따라 '우정'마저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더욱이 청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의 매체에서는 폭력을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다룸으로써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있는 학생들은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약육강식'의 논리가 정확하게 통하고 있는 게 '학교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생들은 힘의 균형에 적응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하는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그러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픈 본능을 띠기 쉽다. 상급생이 되어가면서 그들이 겪게 되면 여러 영향에 따라, 그 본능이 곧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하는데, 곧 싸움을 통해 서로 서열을 매기게 되고 그 서열이 곧 동급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척도가 된다. 상대적으로 폭력을 원치 않은 아이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 강제적 지시에 점차 적응하여 최대한 그 상황 속에서도 편해보려고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그들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들은 그럴수록 더욱 그런 비윤리적 학교생활에 매력을 갖게되고, 쉽사리 그러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때때로 보통의 학생들이 그들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그들은 결국 개개인의 영향력 상실에 위협감을 느껴 속칭 '일진회'와 같은 폭력서클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럼으로써 철저하게 자신들이 지닌 편익을 유지하고자 단합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이르면, 결코 당하는 학생들은 그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고,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학생들이 결코 그것을 달갑게 받아들여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폭력집단 학생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자신들의 피해사례를 서로 나누며 위로한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렇게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말고는, 다른 해결방안에 확실한 신뢰를 갖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자녀가 폭력을 입은 경우나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경우를 생각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런 자리는 얼른 피해라.', '애들은 원래 그러면서 크는 거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라.', '뭐 그런 거 가지고 신경 쓰냐, 소심하게.'와 같은 말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되도록 조용히 무마하라는 요구를 한다. 특히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아빠가 네 나이 때는 더 심했다.'와 같이 자녀의 입장에 대한 이해는커녕 자녀의 문제제기 자체가 속 좁은 자세라고 질책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러한 주변의 반응에 따라 당사자는 소극적인 대처자세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고, 피해상태를 유지해나가 결국 더 심각한 정신적 상처와 그들에 대한 보복심으로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제 2의 그들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혹은 사회에 대한 불신과 회의감으로 청소년 시기에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사회가 쉬쉬하는 태도와 당사자들의 피해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들이 지닌 아픔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 극대화되어 폭발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학교폭력을 주도하는 학생들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분명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행하는 일이 정당하고 바람직한 학생의 자세가 아님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나름의 불만과 상처를 사회가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개하고 결국 폭력적인 태도로 동급생들을 휘어잡으며, 해소하고 방출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그들의 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일방적으로 가해 학생의 태도 자체에 문제의 초점을 잡아 그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지닌 이해 받지 못하고 있는 아픔이 깊어지고 그 해소에 대한 욕구도 강해지면서, 결국 학교 폭력의 양상은 심각해지는 것이다.
폭력을 통해 학생들이 지닌 아픔을 해소하게된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받아온 가정폭력 및 가정불화, 혹은 상대적으로 받아온 학교폭력, 왕따, 그리고 불량한 친구를 사귀는 경우 등을 통해서 그들은 나름의 상처와 해소되지 못하는 아픔을 지니게 되고, 그것을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동급생들에게 행사하면서, 배출구를 찾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상급생에게 받은 갖은 수모는 그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그것을 그대로 복수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게 한다. 역시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학교폭력이 '대물림'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가해자 내면의 문제뿐만이 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면의 상처를 적절하게 해소할 건전한 의식을 함양해 주어야 할 인성교육이 학교 내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비윤리적인 배출구를 택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학교 폭력에 대한 학교측 대응도 외부의 질타를 고려하고 교내에서 자체적으로 조용히 무마시키는 사례가 많았다. 근본적 해결을 모색하지 않은 체 수수방관한 탓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부추겨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당국에서도 폭력추방을 위한 신고접수를 적극권장하면서도 정작 피해학생의 확실한 피해보상 및 사후 배려 등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이 미흡하고, 가해 학생들의 재기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주지 못하여, 다시 사회에 나와서 또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끌어왔다. 불투명한 사건처리가 결국 피해 학생들에게 신고가 곧 확실한 해결방법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홀로 앓다가 문제를 크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학교폭력은 단기간에 이루어져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며, 단순한 어떤 계기를 통해서 발생하는 단순사건도 아니다. 오랜 기간동안 가해자가 느껴온 사회적 불만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표출되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생마저도 처리당국에 대한 불신으로 내면의 상처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상처가 정신적 파멸을 불러오기도 하고, 때론 보복심에 의해 상대적 약자에게 제 2의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원인과 과정이 복합적으로 오랜 기간 작용되어 발생되는 학교폭력은 단순한 규제 강화나 단속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 이해와 해결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학생들은 폭력서클에 비교적 개입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들이 지닌 상처가 비슷하다고 해서, 단체적으로 움직여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분명 불법적인 행위임과 동시에 비인간적인 활동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주변의 친구들이 혹시라도 가입되어 있다면, 탈퇴를 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자신의 주변에서 폭력 사건 발생하면, 최대한 그 상황을 극소화시켜 피해사례가 강도를 낮출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의지와 피해학생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다. 또한 가해학생의 장례를 위한 올바른 선도를 위해, 폭력사례 및 서클 활동을 발견하게 되면 신속한 신고를 통해, 폭력 활동이 근절될 수 있도록 협조하고 동참해야한다.
하지만 이러한 당사자들의 참여가 있으려면, 분명하고 합리적인 사태 해결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단순히 피해학생에 대한 신분보장과 폭력환경차단만이 능사가 아니라, 피해학생의 정신적 피해를 정화하는 치료과정 및 상담활동을 활발하게 제공해야한다. 한편 가해자에 대한 엄중 처벌 및 벌금 등의 법률적인 제재 조치보다는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내면적인 상처를 이해하고 그것을 완화시키고 해소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상담소 및 교육관련기관을 보급하고, 근본적인 의식변화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인성수양의 과정을 갖추어 주어야 할 것이다. 결코 가해자가 지닌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범죄 재발의 가능성을 완화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잠시 흔들린 갈대일 뿐, 아직 사회적 범죄자라고 낙인찍히기에는 너무 미숙한 입장이다. 그들의 선도가 근본적 해결방안이지, 그들에 대한 처벌은 결코 해결법이라고 볼 수 없다. 피해학생에 대한 철저한 보호와 정신적 피해회복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올바른 선도와 사회 재도약의 충분한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고, 그로 인한 선도 사례를 지속적으로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안내한다면, 처리 당국을 믿고 분명 친구를 위해 신고를 하는 진정한 벗들의 노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신고와 선도의 유기적인 활동이 지속될 때, 비로소 학교 폭력사례는 근절될 수 있는 것이다.
다분히 학교폭력 문제를 가해자와 피해자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사회의 부조리와 청소년에 대한 비관적 인식과 무관심이 곧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원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피해자들 중엔 가해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자신보다 더 큰 상처가 있기에 결국 이런 식으로 애들을 괴롭히고 있는 거로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지닌 벗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들로부터 받는 피해에 앞서, 진정으로 가해 학생들의 선도를 바란다. 그러나 학교폭력의 처리는 단순히 가해 학생들을 문책하고 처벌하는 강압적인 처리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에 오히려 그들의 상처만 깊게 하고,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신뢰하지 못하고 신고를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정말 신고를 통해서 그들이 훌륭한 사회인으로 재 도약하는 사례를 눈으로 보게된다면, 신고를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서로에 대한 강한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서로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면, 그 길을 인도하려 애쓸 것이다. 사회는 그러한 바른길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청소년들에게 제시하고, 그러한 사례를 실질적으로 청소년들 눈앞에 보여주어야 한다.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의 처리는 청소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이다. 청소년들을 믿고, 그들에게 귀감이 될 참된 선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를 바란다.
***** 서호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8-08 16:00)
'싸우면서 우정이 싹튼다.' 이런 모순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폭력이라는 것을 삶의 일부로 여겨온 탓이 아닐까? 일제통치하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시작되어 독재정치 땐 계엄령을 통해 군인이 시민을 무참히 폭행한 사건까지. 그러한 암담한 폭력의 역사 속에 피어오른 민주주의의 내면에는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학교 폭력'은 오히려 미미한 수준의 폭력사례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싸움'을 통해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온 과거의 흐름에 따라 '우정'마저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더욱이 청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의 매체에서는 폭력을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다룸으로써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있는 학생들은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약육강식'의 논리가 정확하게 통하고 있는 게 '학교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생들은 힘의 균형에 적응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하는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그러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픈 본능을 띠기 쉽다. 상급생이 되어가면서 그들이 겪게 되면 여러 영향에 따라, 그 본능이 곧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하는데, 곧 싸움을 통해 서로 서열을 매기게 되고 그 서열이 곧 동급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척도가 된다. 상대적으로 폭력을 원치 않은 아이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 강제적 지시에 점차 적응하여 최대한 그 상황 속에서도 편해보려고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그들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들은 그럴수록 더욱 그런 비윤리적 학교생활에 매력을 갖게되고, 쉽사리 그러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때때로 보통의 학생들이 그들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그들은 결국 개개인의 영향력 상실에 위협감을 느껴 속칭 '일진회'와 같은 폭력서클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럼으로써 철저하게 자신들이 지닌 편익을 유지하고자 단합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이르면, 결코 당하는 학생들은 그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고,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학생들이 결코 그것을 달갑게 받아들여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폭력집단 학생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자신들의 피해사례를 서로 나누며 위로한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렇게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말고는, 다른 해결방안에 확실한 신뢰를 갖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자녀가 폭력을 입은 경우나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경우를 생각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런 자리는 얼른 피해라.', '애들은 원래 그러면서 크는 거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라.', '뭐 그런 거 가지고 신경 쓰냐, 소심하게.'와 같은 말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되도록 조용히 무마하라는 요구를 한다. 특히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아빠가 네 나이 때는 더 심했다.'와 같이 자녀의 입장에 대한 이해는커녕 자녀의 문제제기 자체가 속 좁은 자세라고 질책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러한 주변의 반응에 따라 당사자는 소극적인 대처자세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고, 피해상태를 유지해나가 결국 더 심각한 정신적 상처와 그들에 대한 보복심으로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제 2의 그들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혹은 사회에 대한 불신과 회의감으로 청소년 시기에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사회가 쉬쉬하는 태도와 당사자들의 피해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들이 지닌 아픔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 극대화되어 폭발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학교폭력을 주도하는 학생들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분명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행하는 일이 정당하고 바람직한 학생의 자세가 아님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나름의 불만과 상처를 사회가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개하고 결국 폭력적인 태도로 동급생들을 휘어잡으며, 해소하고 방출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그들의 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일방적으로 가해 학생의 태도 자체에 문제의 초점을 잡아 그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지닌 이해 받지 못하고 있는 아픔이 깊어지고 그 해소에 대한 욕구도 강해지면서, 결국 학교 폭력의 양상은 심각해지는 것이다.
폭력을 통해 학생들이 지닌 아픔을 해소하게된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받아온 가정폭력 및 가정불화, 혹은 상대적으로 받아온 학교폭력, 왕따, 그리고 불량한 친구를 사귀는 경우 등을 통해서 그들은 나름의 상처와 해소되지 못하는 아픔을 지니게 되고, 그것을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동급생들에게 행사하면서, 배출구를 찾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상급생에게 받은 갖은 수모는 그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그것을 그대로 복수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게 한다. 역시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학교폭력이 '대물림'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가해자 내면의 문제뿐만이 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면의 상처를 적절하게 해소할 건전한 의식을 함양해 주어야 할 인성교육이 학교 내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비윤리적인 배출구를 택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학교 폭력에 대한 학교측 대응도 외부의 질타를 고려하고 교내에서 자체적으로 조용히 무마시키는 사례가 많았다. 근본적 해결을 모색하지 않은 체 수수방관한 탓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부추겨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당국에서도 폭력추방을 위한 신고접수를 적극권장하면서도 정작 피해학생의 확실한 피해보상 및 사후 배려 등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이 미흡하고, 가해 학생들의 재기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주지 못하여, 다시 사회에 나와서 또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끌어왔다. 불투명한 사건처리가 결국 피해 학생들에게 신고가 곧 확실한 해결방법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홀로 앓다가 문제를 크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학교폭력은 단기간에 이루어져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며, 단순한 어떤 계기를 통해서 발생하는 단순사건도 아니다. 오랜 기간동안 가해자가 느껴온 사회적 불만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표출되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생마저도 처리당국에 대한 불신으로 내면의 상처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상처가 정신적 파멸을 불러오기도 하고, 때론 보복심에 의해 상대적 약자에게 제 2의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원인과 과정이 복합적으로 오랜 기간 작용되어 발생되는 학교폭력은 단순한 규제 강화나 단속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 이해와 해결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학생들은 폭력서클에 비교적 개입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들이 지닌 상처가 비슷하다고 해서, 단체적으로 움직여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분명 불법적인 행위임과 동시에 비인간적인 활동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주변의 친구들이 혹시라도 가입되어 있다면, 탈퇴를 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자신의 주변에서 폭력 사건 발생하면, 최대한 그 상황을 극소화시켜 피해사례가 강도를 낮출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의지와 피해학생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다. 또한 가해학생의 장례를 위한 올바른 선도를 위해, 폭력사례 및 서클 활동을 발견하게 되면 신속한 신고를 통해, 폭력 활동이 근절될 수 있도록 협조하고 동참해야한다.
하지만 이러한 당사자들의 참여가 있으려면, 분명하고 합리적인 사태 해결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단순히 피해학생에 대한 신분보장과 폭력환경차단만이 능사가 아니라, 피해학생의 정신적 피해를 정화하는 치료과정 및 상담활동을 활발하게 제공해야한다. 한편 가해자에 대한 엄중 처벌 및 벌금 등의 법률적인 제재 조치보다는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내면적인 상처를 이해하고 그것을 완화시키고 해소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상담소 및 교육관련기관을 보급하고, 근본적인 의식변화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인성수양의 과정을 갖추어 주어야 할 것이다. 결코 가해자가 지닌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범죄 재발의 가능성을 완화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잠시 흔들린 갈대일 뿐, 아직 사회적 범죄자라고 낙인찍히기에는 너무 미숙한 입장이다. 그들의 선도가 근본적 해결방안이지, 그들에 대한 처벌은 결코 해결법이라고 볼 수 없다. 피해학생에 대한 철저한 보호와 정신적 피해회복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올바른 선도와 사회 재도약의 충분한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고, 그로 인한 선도 사례를 지속적으로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안내한다면, 처리 당국을 믿고 분명 친구를 위해 신고를 하는 진정한 벗들의 노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신고와 선도의 유기적인 활동이 지속될 때, 비로소 학교 폭력사례는 근절될 수 있는 것이다.
다분히 학교폭력 문제를 가해자와 피해자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사회의 부조리와 청소년에 대한 비관적 인식과 무관심이 곧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원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피해자들 중엔 가해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자신보다 더 큰 상처가 있기에 결국 이런 식으로 애들을 괴롭히고 있는 거로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지닌 벗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들로부터 받는 피해에 앞서, 진정으로 가해 학생들의 선도를 바란다. 그러나 학교폭력의 처리는 단순히 가해 학생들을 문책하고 처벌하는 강압적인 처리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에 오히려 그들의 상처만 깊게 하고,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신뢰하지 못하고 신고를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정말 신고를 통해서 그들이 훌륭한 사회인으로 재 도약하는 사례를 눈으로 보게된다면, 신고를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서로에 대한 강한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서로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면, 그 길을 인도하려 애쓸 것이다. 사회는 그러한 바른길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청소년들에게 제시하고, 그러한 사례를 실질적으로 청소년들 눈앞에 보여주어야 한다.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의 처리는 청소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이다. 청소년들을 믿고, 그들에게 귀감이 될 참된 선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를 바란다.
***** 서호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8-08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