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봉순이 언니
광주고등학교
2학년 6반
서호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어머니와 통화 중에 봉순이 언니의 소식을 듣고, ‘나’ 자신의 추억의 상자를 열어 그녀와 함께 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상자 속의 오래된 기억의 종이들을 펼쳐간다.
‘나’는 봉순이 언니를 삶의 첫 사람으로 대면하고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 봉순이 언니가 ‘어른이 되는 문턱’을 넘어가기 바로 전에 그녀는 동네 사내와 사고를 치게 되고 아기까지 갖는다. ‘나’의 어머니가 그 당혹스러운 사고를 해결해주지만, 그녀의 삶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의 작용인지 다시 꼬이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비참함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나름의, 좋은 삶을 위한 마음을 갖고 노력하다가, 다른 사내와 또 사고를 치게 된다. 결국 그녀가 삐뚤어져서 더 이상 함께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화자의 어머니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나’의 어머니는 그녀의 마지막 도움의 요청을 거절하고,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가버린다. 그로서 ‘나’와 그녀와의 인연도 끊기게 된다. 그 기억의 종이까지만 ‘나’의 기억상자에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오늘 ‘나’는 어머니께 그녀의 요즘 생활을 전화로 듣게 된다. 50살이 다 되었을 그녀가 지금도 그녀 나름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삶 안에서 희망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을 ‘나’는 가슴으로 깊이 감싸 안으며, 그녀가 끈질기게 갖는 그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힘들고 절망적인 삶 속에서는 그 끔찍한 ‘희망’을 갖고 삶을 해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소설의 마침표를 찍는다.
나는 ‘나’의 회상에서 인간들의 삶이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간에 ‘인간의 삶’이라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이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것이라 느꼈다. ‘삶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진실이 우리 인간의 삶에 희망과 끊임없는 도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어느 날 화자의 아버지가 가족끼리 놀러 가자고 하였을 때, 어머니는 물론이고 봉순이 언니까지도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들떴지만, 화자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너까지 가면 집 볼 사람이 없잖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들이 대문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자신의 손만 흔드는 눈물이 가슴까지 흐르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입장에 놓인다. 나에겐 감정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그 대목을 읽을 때 그 순간 그녀가 느꼈을 심정과 모습이 내 가슴속을 돌고 또 돌며 아른거렸다. 그토록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녀 스스로가 자신도 가족의 한 구성원일 것이라고 믿었지만, 자신이 고작 식모라는 것과 한 지붕아래 살지만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서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따라 갈 수 없었던 그 슬픔과 혼자라는 고독감이 그녀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속까지 사무치게 느껴졌다. 또한 그녀는 자신과 선을 본 사람이 지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결혼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온갖 병치레와 간호를 하며 힘들게 살았던 모습도 보인다. 남편이 죽을 것을 알고도 그가 불쌍해서, 그가 가여워서 차마 그를 뿌리칠 수 없었던 그 인간적인 美! 나도 똑같은 인간이라지만 결코 따르기 힘든 인간이 갖는 ‘제 2의 감정의 경지’였다. 그녀의 삶이 나에게 감동으로서 느껴지는 만큼, 그 비참함이 인간스러움으로서 아름다운 빛이 발한다는 것이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갖도록 했다. 그리고 50살도 더 되어, 할머니 소리를 들을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그 끔찍한 ‘희망’을 부여잡고, 또 다른 남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의 뇌리 주변을 이유 없이 맴돌았다. 우리들이 ‘그녀는 이용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조차도, 그녀에게는 자신이 바라는 그 끔찍한 ‘희망’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풀기 어려운 실타래 같은 여운을 남긴다.
이 소설을 통해 과연 나는 무슨 희망을 갖고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해보았지만,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나도 그러한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는 끈질긴 ‘희망’이 있는가?
바라는 것도 많고, 하는 것도 많은 내가...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답해본다. 모든 일에는 ‘희망’이 있다. 물론, 내가 행하는 일들에는 나조차도 잘 모르는 ‘희망’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말하기 힘들고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인간이 갖는 ‘제 3의 감정의 경지’! 내가 가진 ‘희망’과 내가 가진 최고의 감정이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고 꿈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느낄 수 있고, 자신만이 다듬을 수 있는 인간이 갖는 ‘위대한 능력’일 것이다. 과연 이러한 진리를 누가 비판하겠는가?
반론하고 싶지 않은 진리일 것이다. 우리가 갖는 ‘희망’이 모두에게 인정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면, 삶 속의 행복은 평준화되어 '개성'이라는 것이 사라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만약, 당신에게 “당신의 갖는 희망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누구나 상대방의 희망을 이해하고 동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컨대, 부자는 거지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고, 거지는 부자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다. 서로가 갖고 있는 ‘희망’을 말하면,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희망입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희망입니다.”라고 말이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걷는 삶은 때론 힘들고 어렵고 지칠 수도 있지만, 그 삶 속에서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제 3의 감정’을 통해 행복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봉순 그녀는 말한다. 아직도 나에겐 아직도 꿈이 있노라고... 그리고 행복하다고...
“우리 모두 희망을 안고 울창한 삶의 숲을 해쳐나가자!”
***** 서호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8-08 16:00)
광주고등학교
2학년 6반
서호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어머니와 통화 중에 봉순이 언니의 소식을 듣고, ‘나’ 자신의 추억의 상자를 열어 그녀와 함께 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상자 속의 오래된 기억의 종이들을 펼쳐간다.
‘나’는 봉순이 언니를 삶의 첫 사람으로 대면하고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 봉순이 언니가 ‘어른이 되는 문턱’을 넘어가기 바로 전에 그녀는 동네 사내와 사고를 치게 되고 아기까지 갖는다. ‘나’의 어머니가 그 당혹스러운 사고를 해결해주지만, 그녀의 삶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의 작용인지 다시 꼬이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비참함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나름의, 좋은 삶을 위한 마음을 갖고 노력하다가, 다른 사내와 또 사고를 치게 된다. 결국 그녀가 삐뚤어져서 더 이상 함께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화자의 어머니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나’의 어머니는 그녀의 마지막 도움의 요청을 거절하고,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가버린다. 그로서 ‘나’와 그녀와의 인연도 끊기게 된다. 그 기억의 종이까지만 ‘나’의 기억상자에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오늘 ‘나’는 어머니께 그녀의 요즘 생활을 전화로 듣게 된다. 50살이 다 되었을 그녀가 지금도 그녀 나름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삶 안에서 희망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을 ‘나’는 가슴으로 깊이 감싸 안으며, 그녀가 끈질기게 갖는 그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힘들고 절망적인 삶 속에서는 그 끔찍한 ‘희망’을 갖고 삶을 해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소설의 마침표를 찍는다.
나는 ‘나’의 회상에서 인간들의 삶이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간에 ‘인간의 삶’이라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이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것이라 느꼈다. ‘삶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진실이 우리 인간의 삶에 희망과 끊임없는 도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어느 날 화자의 아버지가 가족끼리 놀러 가자고 하였을 때, 어머니는 물론이고 봉순이 언니까지도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들떴지만, 화자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너까지 가면 집 볼 사람이 없잖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들이 대문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자신의 손만 흔드는 눈물이 가슴까지 흐르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입장에 놓인다. 나에겐 감정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그 대목을 읽을 때 그 순간 그녀가 느꼈을 심정과 모습이 내 가슴속을 돌고 또 돌며 아른거렸다. 그토록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녀 스스로가 자신도 가족의 한 구성원일 것이라고 믿었지만, 자신이 고작 식모라는 것과 한 지붕아래 살지만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서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따라 갈 수 없었던 그 슬픔과 혼자라는 고독감이 그녀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속까지 사무치게 느껴졌다. 또한 그녀는 자신과 선을 본 사람이 지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결혼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온갖 병치레와 간호를 하며 힘들게 살았던 모습도 보인다. 남편이 죽을 것을 알고도 그가 불쌍해서, 그가 가여워서 차마 그를 뿌리칠 수 없었던 그 인간적인 美! 나도 똑같은 인간이라지만 결코 따르기 힘든 인간이 갖는 ‘제 2의 감정의 경지’였다. 그녀의 삶이 나에게 감동으로서 느껴지는 만큼, 그 비참함이 인간스러움으로서 아름다운 빛이 발한다는 것이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갖도록 했다. 그리고 50살도 더 되어, 할머니 소리를 들을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그 끔찍한 ‘희망’을 부여잡고, 또 다른 남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의 뇌리 주변을 이유 없이 맴돌았다. 우리들이 ‘그녀는 이용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조차도, 그녀에게는 자신이 바라는 그 끔찍한 ‘희망’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풀기 어려운 실타래 같은 여운을 남긴다.
이 소설을 통해 과연 나는 무슨 희망을 갖고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해보았지만,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나도 그러한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는 끈질긴 ‘희망’이 있는가?
바라는 것도 많고, 하는 것도 많은 내가...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답해본다. 모든 일에는 ‘희망’이 있다. 물론, 내가 행하는 일들에는 나조차도 잘 모르는 ‘희망’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말하기 힘들고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인간이 갖는 ‘제 3의 감정의 경지’! 내가 가진 ‘희망’과 내가 가진 최고의 감정이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고 꿈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느낄 수 있고, 자신만이 다듬을 수 있는 인간이 갖는 ‘위대한 능력’일 것이다. 과연 이러한 진리를 누가 비판하겠는가?
반론하고 싶지 않은 진리일 것이다. 우리가 갖는 ‘희망’이 모두에게 인정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면, 삶 속의 행복은 평준화되어 '개성'이라는 것이 사라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만약, 당신에게 “당신의 갖는 희망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누구나 상대방의 희망을 이해하고 동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컨대, 부자는 거지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고, 거지는 부자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다. 서로가 갖고 있는 ‘희망’을 말하면,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희망입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희망입니다.”라고 말이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걷는 삶은 때론 힘들고 어렵고 지칠 수도 있지만, 그 삶 속에서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제 3의 감정’을 통해 행복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봉순 그녀는 말한다. 아직도 나에겐 아직도 꿈이 있노라고... 그리고 행복하다고...
“우리 모두 희망을 안고 울창한 삶의 숲을 해쳐나가자!”
***** 서호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8-08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