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는 그리고 삶을 좋아하는 류시화. 그가 쓴 그의 여행기를 한 편의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이름붙였다. '지구별 여행자'라고...
'지구별 여행자'라는 제목에서 어린왕자가 떠오르는 나의 발상은 오류일까? 나의 뇌 속에서는 '이 책의 내용은 추상적인 픽션일거야'라고 판단하고 신호를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슬슬 나의 뇌가 내린 연산이 그리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책 속의 내용은 너무도 현실적인 삶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제목 그대로 지구별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러한 다분한 사실들이 내가 경험해 본 사실은 아니었다는 것이 나에게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책은 류시화 그가 경험한 여행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내린 오류에 비해서 그가 결정한 '지구별 여행자'라는 제목은 너무 정확하게 알맞았다.
충격과 함께 나는 류시화가 흐른 물줄기를 뒤따라 타보았다. 그가 흐른 물줄기는 인도대륙을 관통하는 큰 흐름이었다. 그 흐름 속에서 그가 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은 내 욕망은 나에게 흐름의 주체가 되도록 하였다. 나는 그가 보고 느낀 것들을 옮긴 이 책의 내용이, 많이 아주 많이 압축되고 생략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디에선가 말했기 때문이다. 종종 기록해놀 만한 것들을 깜빡하고 그저 가슴으로만 느낀다고, 아니 결코 메모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가슴으로 느끼고 배운 것이 잊혀질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뼈 속에 깊히 세기고 싶을 일들이기 때문에 잊혀질 수가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렇기에 그가 느낀 모든 것을 책으로 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뼈 속에 담아두고 가슴으로 음미 하는 것으로도 너무 황홀해 벅찼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기 때문일테고, 독자들에게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음미해보라는 어쩌면 류시화 작자 나름의 선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선물을 하나 하나 풀어가며, 쏠쏠한 재미와 깨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여행은 조선시대에 유유자적하는 선비와 유사했다. 아마 그가 전생에 그러한 선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전생에 못 다 이룬 행랑을 현생에서 까지 이어보려는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는 자신이 스쳐가는 수많은 일상의 속의 스치는 인연에서 스승을 만나고, 보이는 사물에서 본질성을 찾고, 대면하는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존재성을 느꼈던 것이다. 속세가 아닌 인간이 있는, 그 자연 속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동하였다. 인도가 바로 그가 경험한 대 자연의 인간이 사는 삶의 자체였다.
류시화 그는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지닌 단순한 관점으로 인간을 대면하지 않았다. 색다른 눈으로 세상을 주시하였던 것이다. 그의 여행기는 나에게 인도에 대한 그리고 지구 안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여러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인도인들이 느끼는 일상의 지혜 속에서 인간대면의 이색적인 관점들을 보여주었다. 상대를 내면으로 느끼면서 그가 지나온 삶을 느끼고 대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가 만난 이들에겐 항상 정신적인 여유와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었다. 속박되어있지도 않았고, 부족한 삶에 놓여있지도 않았다. 그들의 자신들의 정신적인 수양에 매우 충실했으며, 그들이 직면한 순간에 전념했다.
그리고 류시화는 그가 엿본 인간의 이면의 것들을 뼈에 하나 하나 곱게 새겼다. 자신이 경험한 생활 속에서 그들이 지닌 본질탐구의 모습을 배워갔던 것이다. 현대의 속세에서 느낄 수없는, 그리고 쉽게 스쳐갈 만한 일상의 경험들을 그는 조목조목 이해하려했고, 결국 담아내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처럼 삶에 관심을 갖고 깨달음에 목말라하는 이가 아니라면, 스쳐가는 배경으로서 잊혀질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은 책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보이는 모든 것이 책이었다"라고 말한다. 결국 모든 것을 배움과 깨달음의 대상으로 여긴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그의 모습이 내가 그에게 색다른 관심을 느끼게 하는 면이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그는 그러한 깨달음과 경험 속에서 그가 걷는 땅은, '세상에 류시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는 그것을 즐겼고, 그것에 감사했으며, 그것을 위해 한발짝 한발짝을 내 딛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에겐 삶의 의미로서 다가왔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인도라는 대륙을 자주 찾는 이유가 바로, 그가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유유자적하며 즐길 수가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는 인도를 찾아갈 때마다 공항에서 인도 땅을 밟는 그 순간부터 긴장과 흥분과 기대를 갖을 것이다. 그를 기다리는 수많은 인연들과 그 만남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깨달음과 지혜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러차례의 여행에서 그는 이미 예약된 만남에 대한 경험을 했다.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스승은 그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측했하고 있다는 것이 그와의 만남과 깨달음이 이미 예약된 운명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면은 참으로 세상에 허구적인 현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의 내용을 요약 서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책은 내용을 읽고 단순히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하는 종류의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류시화가 뼈에 새긴 수 많은 느낌들의 엑기스만을 뽑아서 짧게 책으로 엮어놓은, 단편 시나리오에 불과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얻어야하는 것은 그가 보고 느끼는 삶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놓치기 쉬운, 깨달음을 포착하는 일상에서의 배움을 몸소 실천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그가 경험하고 뼈에 새긴, 교훈을 독자가 자신의 사고의 날개를 펼쳐 높이 날아올라 폭넓은 안목과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한편의 멋진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주체적으로 류시화가 느꼈을 새로운 관점에 대한 놀라움과 감동을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다.
류시화 그는 이 책이 단순히 읽히기만을 바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일상에 대한 참된 이해와 새로운 인식의 관점을 지니는 것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일상의 경험은 삶의 윤택함을 저하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삶과 그로부터 얻어지는 깨달음을 이심전심으로 느끼길 바라고 썼을 것이다.
결국 '지구별 여행자'는 류시화 자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닌, 현실에 두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모든 독자들 개개인을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여행자가 지닌 여유로움과 폭넓은 관찰력 그리고 호기심과 도착점을 향한 강한 열정과 첫대면에서 오는 긴장감과 서로에 대한 이해를 지니는 삶, 이것들이 곧 우리가 지녀야할 현시대의 여행자로서 지녀야할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단지 지구라는 별에 잠시 여행와 몇십년을 살다가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외계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지구별 여행자인 것이다.
모든 지구별 여행자들의 행복과 안녕을 빌며... 세이 굿바이.
***** 서호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8-08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