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vs. 인간 3편
‘친구’라는 관계를 좀 더 원초적으로 생각해보자.
원시이후엔 타 혈육 간의 밀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혈육처럼 신뢰할 수 있고 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원했을 법하고... 우린 대개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칭한다. 왜 '친구'라는 개념이 필요했을까?
이는 과거에는 즉 원초적으론 '남'이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점차 사람과 사람이 '효용'과 '가치차이'로 엮어지는 구조가 가시화 되면서 그 구조에 따라 사람을 '남'으로 분별하게된 것이다. 이것에 대해 본능적인 불쾌감이 느껴졌을 것이고, 때때로 깊은 사색을 한 사람은 이에 대해 ‘비인간적 인간관계’라며 자괴감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현대에도 속칭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칭하며, 대인관계를 '효용'과 '가치'개념으로 살피는 사람을 비인간적이고 심지어는 몰인격적인 사람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러한 자괴감이 없는 관계에서 원초적 본능적 안정감과 안락함을 느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관계로 내세울 수 있는 비가시적인 '효용'과 '가치차이'를 지닌 인간관계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친구'다. 가시적인 재화나 권력을 가지고 논하는 관계는 자연스럽게 노골적으로 그 '효용'과 '가치차이'로 맺어졌다는 것을 누구나 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함께한 추억이 많이 있고 그것을 함께 회상하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기쁨이나 아픔을 함께한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음'이라는 '가치'를 지닌 사람과의 친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훨씬 관대하게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추억의 공유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면, 예컨대 어린 시절 기억이 안 나서 상대가 떠올리는 추억을 자신이 회상하지 못하거나, 서로 엇갈리게 회상한다던가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가치'는 훼손 받게 되고 서로는 서로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만약 서로에 대해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코 둘은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다.
대개 우리가 ‘순수한 친구’라 함은 ‘오래된 죽마고우’, ‘불알친구’를 의미하는 편인데... 그 친구들과는 서로가 허물이 없다는 특성... 그것을 ‘순수’하다고 미화시켰을 뿐, 사실상 우린 이기적이게도 서로 함께 했던 기억을 함께 기억하고 떠올려 줄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정에 공감대를 나눌 수 있다는 만족감, 게다가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자신의 입장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따위의 ‘자기이익’을 가지면서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은 결코 그런 거 안 따진다고 부인하고, 순수하게 그 사람이 좋아서 친구로 지낸다고 하겠지만... 좀더 솔직하게 자신과 그 사람과의 만남에서 나누는 대화와 생각을 되돌아보면... 기분 좋았던 기억은 그 사람과 자신의 추억이 일치하고 공감대를 얻어서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 했던 기억,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이해해주는 태도 등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분명 그 친구와도 기분 나빴던 기억이 있을 것인데, 그건 대부분 엇갈린 기억(예를 들면 똑같이 점을 보러갔을 때 점술가가 B가 A를 항상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A는 B를 그닥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고 하자. A는 이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B는 반대로 기억해서 자신이 A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다가 어느날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느꼈을 B의 감정)이나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를 무너뜨렸을 때... 객관적인 견해에 대한 존중보다는 배신감 따위를 느끼기 쉬웠을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실존주의 입장에서 논리를 펼치려고 하기 때문에...
친구에 대한 ‘진심’ 따위를 거론 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 진심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가 관건이다. 내 입장에서는 어떤 결과를 거두절미 하고 자기가 포장하고 싶은 부분만 미화시켜서 ‘진심’이라고 칭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와의 만남에서 느꼈던 감정과 그 순간 나눴던 대화와 행동 등을 떠올려보면...
결국은 그 친구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좋아해서 만난 게 아니라, 그 친구라는 존재가 곧 자신의 존재를 반증하고 보존하고 자신을 대신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중심적 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결론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특성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며, 단지 그 이기적인 걸 노골적으로 표출하는가~ 아니면 친구라는 관계처럼 비가시적으로 은근히 드러내는가의 차이로 사회적 관점의 잣대에 의해 판가름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까놓고 보면 다 이기적인데 말이다...
이런 면에서도 인간은 자의적으로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떠올릴 법하다.
대개는 이러한 자신의 태도와 ‘친구’관계가 ‘효용’과 ‘가치차이’의 측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다수가 무의식적 본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이고, 간혹 몇몇이 자각하더라도 문화 전체가 그러한 비가시적 계산적 관계를 미화해서 옹호하기 때문에... 냉철하게 보려는 나와 같은 관점 자체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물론 어디까지나 이 전체적인 내용도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이제 막 내 우주관이나 인생관, 삶에 대한 철학에 한 획을 그었을 뿐이다.)
다시 본론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원초적으로 본다면 지금의 '남'이라는 존재도 원래의 하나의 유전자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나도 진화론적 추측을 믿고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남' 뿐만 아니라 동물과도 사실상 우린 '아가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런가...? 더욱이 현대 사회에서 '아가페 사랑'은 과거보다 더 풍부해졌는가?
원시시대에는 공동생산을 해서 공동분배를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힘들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았기에... 소수 밖에 없지만 협동하여 수렵활동을 했었을 것이다. 그 수렵에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자식과 형제 부모였을 것이다.
정착을 하고 농경사회가 되었을 때는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역시 공동생산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고, 점차 그 영역이 커질수록, 다른 마을의 인력까지도 상황에 따라서 서로 필요할 때 돕는 ‘품앗이’와 같은 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는 아무리 ‘남’이지만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생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그다지 이해타산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다들 모여서 함께 열심히 노력해야만 원하는 만큼의 곡식을 얻었다. 그랬기 때문에 서로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고, 서로의 축복과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직접적으로 느낄 법했다. 서로의 존재가 자신의 생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아가페적인 사랑의 자세로 후하게 대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요새도 ‘시골인심’을 거론하지 않는가...?
그런데 요샌 현대의 인심은커녕 시골인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존재가 없어질 때 그 피해가 자신에게 온다면 이기적인 인간은 결코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 할 수 있다.
현대에 올수록, 서로의 의존성은 떨어져갔다.
10명이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을 능력이 있는 한 명이 해결을 하고...
10000명이 평생 농사를 지어야 할 수확을
10명의 엔지니어가 계발한 농작기계로 몇 년 만에 수확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만큼 삶 자체에서 실질적 근친(혈육)관계가 아니고서는 ‘아가페 사랑’을 줄 만큼 서로에 대한 필요성을 근본적으로 지닌 환경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대의 도시사회는 더욱 더 개인화되고,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어가는 시점에서(이러한 이유는 과학의 발달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이라는 존재는 상황에 따라서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일시적 필요에 따른 얇고 넓은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형성되기 쉬운 것이다. 얇고 넓은 인간관계를 나쁘게 볼 수 없는 것이, 그게 현실적으론 자신에게 약점이 많을수록 상황에 따라 그 약점을 채워줄 사람이 이곳저곳에 조금씩 있어야 자신의 안정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그 사람보다 약점이 덜 있는 즉, 유능한 사람은 그냥 이 사람 저 사람 보다는... 실속을 따지고 자신의 수준에서 자신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사람과 관계를 가져야 안정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능력차에 따라 인간관계의 판세가 나눠지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그렇게 나눠지는 것을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분류가 평범한 부류에 속한 우리에게 피해가 된다는 보호심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작 우리는 우리보다 열등(비인간적 측면이 아니라 솔직한 표현으로 사용한 어휘다.)한 부류에 대한 평가를 무의적으로 하게 되고 그다지 그런 부류와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우리 보다 유능한 부류에서의 그런 태도는 못마땅해 한다. 게다가 유능한 부류의 인구는 평범한 부류보다 적기 때문에 평범한 부류가 대부분인 대중적인 심리는 역시나 ‘불만’이라는 두 글자로 ‘유능한 집단’을 비난하기 쉬워진다.(여기서 유능함과 열등함의 기준은 사회적 평가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욕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급자족 능력을 의미한다.)
왜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자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인 행동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사회와 문화가 빚어놓은 껍질에 눈을 가려서 본질적인 프로세스(Process)와 심리를 모른 체 살아간다. 그래서 단순히 감정적으로 상황을 직시하려하고, 좀 더 냉정하고 솔직하게 현실을 직시하다보면 지금까지 자신이 가져온 사회가 쥐어준 문화와 종교가 퍼트려 놓은 의식과 자신의 행동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자괴감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 그 포장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 서호건은 솔직하고픈 사람이다. 적어도 나 자신에겐 더욱 더 솔직하고픈 사람이다. 내가 살면서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태도를 취하고 이런 말을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가 떳떳하게 알고 있어야 생각하고, 태도를 취하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 모르면서 아는 체하고, 모르면서 비난하고, 모르면서 따지는 그런 바보 같은 인간이고 싶진 않다. 물론 나는 지금 내가 3편째 쓰고 있는 이 생각을 아직까진 단순한 생각으로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확신이 들면, 그 때 비로소 ‘나에게 있어서의 진리’가 되겠지만 아직까진 나는 임상적인 가설만을 서술하고 있다.
오늘도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좀 쉬어야 겠다.
< 인간 vs. 인간 4편에 이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