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야, 안녕?
아빠가 참 오랜만에 네게 편지를 쓴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치기 어린 마음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자빠지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고, 그렇게 겨우 한 발짝 한 발짝 더 나아가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하루하루 살다보니... 널 떠올릴 마음의 여유는 고사하고 아빠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도 없더구나...
생각해보니...
이건 마치 "헤어지자" 말하는 연인에게, "미안하다" 대답하는 것 같네...
그 지경이 될 동안엔 몰랐지... 모른 채 살아온 거지... 무엇을 놓치고 또 무엇을 못 보고 있는지를...
눈 앞에 불길을 끄느라 119를 불러야 함은 잊고서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소화길 붙들고 가진 애를 쓰고 있는 거처럼 말야~
그렇게 우린 가끔 매 순간 무엇이 더 중요한 건지 종종 잊기 마련인 거 같구나...
그간 아빤, 아빠 스스로와의 사랑에서... 그리고 미래의 너와의 사랑에서...
잠시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잠시 잊었던 거 같아...
사실 귀찮았어~ 그냥 모든 게... 다 피곤하고, 버겁고, 지치고, 또 외롭고...
부지런히 달리고 또 달려서 오늘 하루를 살았는데... 한숨 내쉬며 침대 위에 드러누은 나는...
마치...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는 네 바퀴 중에 하나의 휠을 고정하는 나사 하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공허한 거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그렇게 독한 술을 마셔도, 한없이 즐거운 친구들을 만나도...
그래도 뒤돌아 서면...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 가슴 깊은 곳에 텅빔.
그게 바로...
스스로와의 사랑에서 자각했어야 할 "외면"이었던 거 같구나... 아빤, 그동안 아빠 스스로를 외면했던 거야...
세상에는 '내'가 아주 잘 포장되어 내보내어지고 있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또 격려와 칭찬을 가끔은 힐난을 하지~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이 지닌 나에 대한 관심이고, 정작 나 스스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거야~
세상이 나에게 관심을 주니까 나도 세상에 관심을 가질 뿐...
진정 내 자신에게는 무심해지는 거지...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말야...
슬프게도... 세상은... 구름처럼 움직이고 변화무쌍하단다.
그 관심은 어느 순간 무관심되고,
그 칭찬은 어느 순간 질투와 시기가 되고,
그 격려는 어느 순간 부담과 비난으로 되돌아 오기 마련이더라...
그런 변화들에 우린 너무나도 취약하지... 너무 쉽게 상처받고, 너무 쉽게 무너져...
그런 힘겨운 순간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인 '나 자신' 즉, 스스로가 없으니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내 주변이 180도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늘 스스로를 이해하고 또 들어주고, 언제나 응원하는... 내 안에 '내'가 없으니까...
아빠의 삶에 '스스로'가 없는데 어떻게 감히 '너'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니?
너를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아빤 아빠 스스로를 아끼고 보살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서, 이제와 스스로에게도 미안하고 또 네게도 미안해지는구나...
앞으론 좀 더 노력할 거야... 바보처럼 놓치지 않을 거야~ 아빠 스스로와 또 미래의 너와의 오붓한 대화의 시간을...!
이 편지를 네가 읽을 즈음이면, 우리 아리도 아마... 20대에 들어서,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또는 조금 더 늦게...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못할 만큼 정신없이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살며 네 생애 한 챕터를 부지런히 메우고 있을지도~
그 땐 아빠가 네게 "우리 저녁에 둘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해도,
우리 아린, "아빠, 미안한데요. 요즘 제가 너무 바빠서 당분간은 안 될 거 같아요. 이해해줄꺼죠?"라며,
아빨 무심히 외면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빤 네게... '이놈의 가시나 다리 몽둥이 콰악 그냥 뽀사뿔까~!?'라며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네 엄마로부터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야속함과 서운함을 어렵사리 쓸어내리며...
"그래~ 그래도 밥은 제 때 잘 챙겨먹구~! 우리 아리 화이팅이닷!"라고 답하고 있으려나?
아니... 아빠는... 네가 그런 날에... 그냥... 네가... 한번쯤...
"좋아요~ 제가 살게요! 대신 이번에 이 레포트 못 내서 학점 빵꾸나는 건, 아빠랑 같이 밥 먹는 거로 우리 퉁 치는 거에요~! 오키?"
이렇게 그냥... 가끔은... 네가 애써 쥔 것들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너의 멋진 용기를 보였으면 좋겠구나~
글쎄... 아빠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건가^^?
아니야~ 아빤... 그날은 결국 너와 밥을 안 먹을거야...
먹지 않아도 우린 충분히 느꼈을 테니까~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나는 네 레포트에 밀리지 않았고, 너는 학점 따위에 너에 대한 아빠의 사랑이 밀리지 않았으니까...
아마 아빤 네게 이렇게 말할거야... "그럼, 내일 먹자~ 더 맛있는 걸로! 콜!?"
아빠를 반만 아는 사람들... 나름 반듯한(?) 모습만 본 사람들은 아빠가 그런 도발을 하며 세상을 살고 있음을 모르겠지만...
아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떠올리며...
내려놓기 쉽지 않은 걸 과감히 내려놓는 시도를 많이 해왔던 거 같아~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보여준 거 같아.
'이건 내 생애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것 때문에 그걸 포기하는 건 분명 후회할 일이 될 거야... 증명하자! 내 자신에게!'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 정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그런 시도를 꾸준히 해왔지~
소설을 보면 스토리의 기승전결에 따라, 주인공들은 수 많은 에피소드를 헤쳐가나가며 각자의 캐릭터를 잡아가잖니~
우리도 우리 각자의 개성을 그렇게 삶의 무대에서 뛰놀며 스스로에게 증명하며 만들어 가는 거란 생각이 들어~
사실 아빠의 20대 초반은 늘 목표지향적이었던 거 같거든~
학점이든, 자격이든, 상이든, 사람이든, 심지어 사랑까지도...
그 모든 각 챕터에 확고한 답들을 어떻게든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얻고 싶어했던 거 같아~
이런 마음에선 사소한 거 하나까지도 쉽게 내려놓기 정말 힘들었겠지~
그래서 어느 것도 놓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꾸역꾸역 살았던 거 같아
왜 그랬을까? 왜 아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했을까? 그게 아빠란 사람의 옷이라고 생각해서 였을까?
좋은 학점, 많은 자격증, 훌륭한 상, 멋진 친구들, 남부러운 연애...
그것들이 아빠를 꽤 장래가 촉망한 인재로, 멋진 청년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던 걸까?
글쎄... 지나놓고 보니... 참, 그게 뭐라고 그렇게 아둥바둥했나 싶어지는구나...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이 전혀 의미없는 것들이란 말은 결코 아니란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실패, 좌절 또는 성공, 승리 이 모든 것들에서 일희일비하며
짙은 괴로움과 잔인한 우월감에 사로잡혔던 나날이 참으로 아름다운 청춘이면서 동시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넘어질 수는 있어,
아플 수도 있어,
울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시 걷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던 거 같아...
또 다시 넘어질까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었던 거 같아~
그리고 설령 넘어진대도, 영영 다신 못 일어날지라도...
지옥같은 삶이 아닌 그저 또 다른 삶이 있을텐데 말야~
목표를 쫓고 쫓다보면... 결국엔ㅡ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걸 얻을 수도 있고,
만인의 응원과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감 가득 세상을 마주할 수 있어,
허나 그것이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무관심해도 될 명분은 될 수 없는 거 같구나~
더욱이 그 성공이 온전히 나만의 능력으로 이뤄진 것이란 착각에 빠져 세상을 평가하고 남을 평가할 필요는 없었던 거 같아~
무언가를 얻기 위해 불철주야 정진했던 나날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것들이 돌려준 슬픔과 기쁨이 지난 후 몰아치는 공허함.
아빤 이걸 파도에 비유하고 싶구나~
파도... 예기치 않지~ 변화무쌍하고~ 그리고 의외로 매우 무시무시 하단다~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감히 뛰어들 엄두를 못낼 정도지~
그 파도를 타는 것이 아빠의 20대 초반의 모습이었던 거 같구나~
좋은 서핑보드, 좋은 서핑복, 근사한 선글라스, 쭉쭉 빵빵 비니키 여자친구~
그 안에서 바닷물 꾸역꾸역 먹어가며, 죽을 똥 살똥 어떻게든 파도를 한번 타보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거지~
그러다 어쩌다 한번 파도를 제대로 잘 만나 신나게 타면, 물길 가르고선 이제 좀 된다며 겁 없이 더 거친 파도를 쫓아 가지~
그래봤자 그 바다 그 파도인데 말야... 처음 서핑을 시작한 그 해변에서 벗어나지 않아~
그리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파도를 제대로 타는 게 아니라, 나에게 맞는 파도만 기다리는 게 되지...
그런 파도가 다시 오지 않으면... 우린... 바다를 원망하고, 하늘을 미워하게 되지...
그럴 수도 있어... 충분히...
그런데 말야... 정말 파도를 타는 걸 내가 제대로 익히면...
좋은 파도, 나쁜 파도, 지금 이 바다, 저 멀리 새로운 바다...
그 모든 게 다 나의 무대가 될 수 있거든...
서핑보드 중요하지, 서핑복 중요하지, 선글라스 중요하지, 응원해줄 사람 중요하지~
그래 중요해... 그런데, 그게 정말 가치있을 만큼 중요해지려면 나에게 먼저 파도를 다룰 충분한 기량이 갖춰져야 한단다.
그 전까진 주객이 전도된 거에 불과해...
아무리 좋은 회칼을 우리에게 준들 우리가 물고기를 제대로 썰 수나 있겠니?
우리집 부엌 칼을 저기 횟집 사장님께 드려도 그분은 맛잇는 회를 내어주실 텐데 말야...
칼은 분명 중요하지... 그러나 그 본질인 회뜨는 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거지...
회가 '목표'고 칼이 '도구'라면, 회뜨는 법은 '기술'... 운동에 비유하면 '자세'겠지?
자 이제 좀 느낌이 오니? 아빠가 무슨 얘길 하고자 하는지...
삶에 있어서도 '도구'를 분명 중시해야할 시점이 있으나, 그 보다 앞서 반드시 '자세'가 갖춰져야 한다는 거야...
자세가 되면 어떤 도구든 주어진 도구를 가지고 결국엔 비스무리한 결과를 얻어낼 가능성이 높단다.
투수가 야구공으로 던지나 돌맹이로 던지나, 분명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맞추는 건 비슷하게 해낼 수 있는 거처럼 말야...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그 칼을 쓰는 자세를 잘 가꿔놓으면... 회가 아닌 다른 요리를 할 때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야...
하나의 자세를 제대로 잡는 게 왜 다른 요리에도 도움이 될지는 사실 경험적으로 밖에 느끼기 쉽지 않는 자각인데...
음... 우리 아리가 책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있을 줄은 모르겠지만,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쓰며 좋은 글에 대한 자세를 익혀놓으면,
다른 언어를 배움에 있어서도 굉장히 수월하고 또 표현력 역시 다채로워질 수 있단다.
분명 남들과 똑같이 외국어를 배우더라도 설령 덜 배우더라도, 정작 만들어 내는 것은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어~
그건 처음 배우고 익힌 언어에 대한 좋은 자세를 지녔지 때문이지~
비단 이런 공부나 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많은 요소들... 직업, 취미, 인간관계, 연애 등에 대한 좋은 자세를 갖는 것이...
좋은 직장, 멋진 취미, 화려한 인맥, 뜨거운 연애를 지향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내가 지금 누리는 삶이 같은 직장, 같은 취미, 같은 인맥, 같은 연인일지라도
그로부터 느끼고 채워가는 삶의 추억들의 아름다움은 감히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할 수 있단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가
너를 그자리에 온전히 빛날 수 있게 할테니까~
캔버스든, 휴지든, A4든, 천이든 네겐 상관없을 거야~
네가 그린 그림의 아름다움은 바로 너라는 '색' 그 자체일테니까...
네가 어디에 있든 네 존재가 곧 명작인 거야~
네가 그 안에 온전히 담겨 있기에
그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을 수 있는 거야~!
아리야~ 오늘은 그 속에 아빠도 함께 끼워넣어보는 건 어떻겠니?
저녁에, 아빠랑 둘이 찐하게 쏘주 한잔! 콜!?
♬ 그대에게 - 무한궤도(신해철)
숨가쁘게 살아가는 순간 속에도
우린 서로 이렇게 아쉬워하는 걸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그대와 둘이서 나누고 싶어요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나는 그대 숨결을 느낄 수 있어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그댈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