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해! 라는 말보다 가능할까? 될까? 라는 말을 되뇌이게된 나.
코리아테크 인턴으로 근무할 당시 김한정 사장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우린 "될까?"가 아니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좋은 직장을 가서나 대학원을 가서 연봉 5천 6천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월매출을 5천 6천을 만들어낼 것을 궁리해야한다."는 마지막 말씀...
그날 나는 고개숙여 그 말을 가슴에 새기겠노라고 약속 드렸다.
그러나 지금 내 가슴엔 그런 말들이 흐릿하게 지워지고 닳아지고 있다.
시련이 도사릴 것을 알고 달려드는 도전과 자신감, 용기보다는 삶에 안정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가고 있다.
더욱이 아버지의 "하면된다" "프로정신 구현" 정신에 비하면, 당신의 아들의 이런 마음의 기울기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무릇 삶을 풍요롭게 일궈가는 이들은 가능하다는 무엇이든 된다는 생각으로 삶을 이끌어가고 있음을 느껴왔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내면적 부조화 역시 보아왔다. 이윽고 아버지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위선자의 모습들을 보아왔다.
새삼 인생에서 소중한 것 중 하나가 롤모델을 갖는 것임을 느낀다.
나도 그렇게 훌륭하게 살고 싶다는 동경. 삶의 열정을 불붙일 모티브 말이다.
대한민국의 훌륭한 지도자들은 이런 젊은이들의 생각에 한편으로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고, 동시에 우환을 느낀다.
장차 10년 후의 대한민국의 주축이 될 사람들이 도전보다 안주에 머무르고 능동적인 삶의 설계보다 주어진 일만 닥치는대로 소모품적인 삶의 행태를 따라가는 모습에서 과연 대한민국은 지금 누리는 한류의 기상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한류라는 것의 본질부터 우리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지금 한류랍시고 우리가 뿌듯해하는 자국의 모습에서, 그 한류 덕분에 우리나라의 국민들의 밥상이 더 풍성해졌는가 더 살만해졌는가 다시금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엔터테이먼트도 하나의 큰 비즈니스다. 그러나 그 비즈니스는 마치 대형 할인 마트가 들어서면서 재래시장이 죽어가고 구멍가게가 죽어가듯... 소수만의 업종인 연예계통의 수익성이 날로 치솟을수록, 다수가 필요로 하는 제조 산업에 대한 기대와 꿈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연예인이 될래, 기업사장이 될래? 라고 묻는다면, 과연 지금 대다수의 대학생들은 무어라 답할까?
과연 저 질문을 1960~70년대 대학생들에게 했다면 무어라 답했을까?
그리고 또 저 질문을 조선시대에 했었다면 무엇이라 답했을까?
장차 대한민국의 미래를 한류열풍에서 찾을 것인가?
대한민국에 노래 잘부르고 피아노 잘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아도,
정작 인류를 감동시킬 명곡을 만들 작곡가와 영화감독 등이 드물다는 도올선생님의 말씀이 다시금 떠오른다.
우리에게도 세상을 바꿀 힘이 정말 있는가?
어느 나라나 소수의 지배계층이 배부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감언하겠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결국 배부른 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야생 동물들의 세계엔 인간처럼 배가 불러 게을러질 수 있는 계층은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상대적으로 배가 덜 고픈 동물들이 있을 뿐. 어쨌든 인간사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계층이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런 보이지 않는 사회지배구조는 어떠한 이념적 제도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린 지난 이데올로기를 겪으며 배워왔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피지배계층이 그 지배계층이 누리는 영위에 비해 터무니 없는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글쌔 솔직히 그런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일류 문명의 시작과 그러한 구조가 지금까지 이뤄온 일련의 역사 전반이 잘못되어왔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본주의는 과거 봉건제도나 노예제도와는 구조가 다른 지배 피지배구조의 또 다른 이름일 뿐...
자본주의 자체가 불평등한 삶의 양태를 내포하고 있는 구조이다.
혹자가 공산주의의 반대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는 약간의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인은 현 인류가 크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가지 경제적 구조와 독재정치와 민주정치라는 두가지의 정치형태로 나뉘어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 앞에 언급했다시피, 자본주의는 피지배계층에 대한 불합리적인 대우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피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한 민주정치를 통한 사회복지와 제도가 갖춰지게 된다. 따라서 현 인류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기반으로 구성되어있으나, 정치라는 문을 통해 제도적 장치를 넣었다 뺐다하며 피지배계층의 불평등성을 인위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허나 대다수 이들이 피지배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불만이 더욱 강하게 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현세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선진국 모두는 빈민국에 대해 죄를 짓고 있다는 말이 될테니 지금 비록 자신이 속한 국가 내에서는 피지배계층에 속해있을지라도, 상대적으로 제3국 혹은 아프리카 등지의 사람들에게는 지배계층에 속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는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죄를 스스로에게 부가하는 것에 해당한다.
나는 이러한 현세에 대해 더이상 그것이 죄다 아니다를 거론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사고방식에 큰 변화 중의 하나가 이러한 이분법적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인류의 방향이 무엇이며, 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진행을 위해 우리 각자는 각국은 어떠한 노력과 준비를 해야하는가를 생각하게된 점이다.
과거 무엇이든 선을 그어놓고 생각을 전개하려던 것에 비해, 지금은 갑론을박 보다 대안을 생각하려 노력한다.
도올 선생님께서는 진보냐 보수냐 이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이는 회색분자요 기회주의자라고 하셨는데, 나는 진보냐 보수냐의 개념보다는 세상의 지향점을 어디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 문제와 시점에 따라 진보에 설수도 있고 보수에 설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냐 보수냐의 직선적인 가치기준으로는 곡선으로 부드럽게 삶을 제단할 수 없다. 이는 결코 회색분자가 아니며, 이념보다 사람을 앞세운 보다 정직한 중용의 마음가짐이요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언제까지 선진국과 빈민국의 격차의 원인이 무엇이다 그게 맞다 그르다를 논하며, 굶어죽어가는 이들 앞에서 펜대 굴리며 말씨름만 할 것인가? 진보든 보수는 문제가 뭐 때문이었는지만 캐내지 말고, 우리가 왜 빈민국에게 원조를 해야하는지, 그 이유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로부터 우리가 지향해가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누구도 다음 행할 행동에 대해 의문을 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논제도 사람에 따라 국가적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으므로... 만약 절대 다수가 원하는대로 인류가 지향해야하는 것이 맞다면, 세상은 중국의 의도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중국 국민은 중국 공산당의 지배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결국은 중국공산당의 의도대로 인류는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중국공산당의 생각 역시 어떠한 외부세력으로부터 일정부분 영향을 받을 것이므로 아이러니컬 하게 세상은 다수의 목소리보다 힘있는 몇사람의 조용한 말 몇마디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또 사실이기도 하다. 히틀러에 명령에 인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힘있는 한 사람의 명령이 세상을 뒤집어 엎은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한반도의 6.25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국민이 원하기보다 국가의 지배세력이 원하여 자행되어 왔다. 그리고 국민은 국가의 뜻에 동조해야만 했고, 실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 세상은 결국 소수에 의해 움직이고, 누구든지 그 소수가 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에도 전 세계에도 수많은 기업가와 부자들 그리고 뛰어난 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조차도 세계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쉽사리 내놓지 못한다. 오히려 매번 틀려서 평범한 서민들의 삶을 옥죄어가기 십상이다. 최근 유럽 사태, 미국 경기 불황, 일본 경기 침체의 지속, 노키아의 몰락과 핀란드의 경제 위협, 원인조차 모르는 각종 인류 재난 등... 풀어야할 난제들은 수도 없이 많으나, 그 많은 사람들은 해법을 못 내놓고 있다.
이런 세상 앞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린 무엇을 위해 삶을 일궈야하나?
정의롭게 살겠다던 순수하고 어렸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정상에 오르기까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아서 그때가서 정의를 내가 직접 구현하든지,
아니면 정의실현은 마음에 비우고, 현실적인 처세를 행해야할지...